메뉴 건너뛰기

XEDITION

1기 어린이울림방

전곡리 자료입니다.

2008.04.24 15:08

^^; 조회 수:178

1. 전곡리 구석기 축제 홈피 주소입니다.

       http://www.goosukgi.org/

2. 인류오딧세이 자료(DVD)를 신청했습니다. 울림사무실로 배송되게 했는데.. 아마 담주 수요일까지는 배송이 될겁니다.
    대장님이나 깜찍이가 잘 챙겼다가 올라오는 차에서 아이들과 함께 보면 전곡리, 인류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아주 도움이 됩니다.
    무엇보다 아주 재밌습니다. 3년전 울산교육생협에서 '역사'를 주제로 방학교실을 했을때 아이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입학식날 보여주었는데..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어려워 할까봐 중간에서 껐습니다.  아이들 난리났습니다.
   "빨리 틀어줘요!!!"ㅋㅋㅋ 아마 잘 볼거라 생각합니다. 학년에 상관없이요~~♬
     
    DVD인데.. 차가 두대가 오면,, 복사 떠서 같이 볼수있었으면 하는데.. (이거 전문적으로 복사떠주는 친구 울산에 있는데.--;)



3. 간단하지만.. 읽으면 조금 도움이 될 전곡리 이야기입니다.

전곡리 주먹도끼


2000년 11월초 일본 마이니치 신문이 보도한 ‘구석기 유적 조작’ 사건은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 신문은 미야기현 기마다카모리 유적 발굴 현장에서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가 가짜 석기를 파묻는 장면을 찍은, 이른바 몰래카메라를 폭로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후지무라가 발굴한 구석기 유적이 몽땅 조작이었음이 들통 나고 말았다. 이로써 잇단 발굴을 통해 70만 년 전까지 올라갔던 일본의 구석기 연대는 모두 가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일본 고고학계는 구석기 유적 노이로제에 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후지무라가 자작극을 연출한 이면에 한국의 구석기 유적 발굴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7만 년 전의 구석기 유적이 한반도에 있었음을 보여준 경기 연천 전곡리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자, “한반도에는 있는데 일본에 없을 리 없다”고 초조감을 드러낸 일본학자들이 구석기 유적 찾기에 혈안이 된 것이다. 이런 일본 학계의 좌절감에서 비롯된 게 바로 후지무라의 자작극이었던 것이다.


사실 일제강점기 일부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에서 구석기의 존재를 발견했지만 묵살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연천의 전기 구석기 유적 발굴은 우리나라에 고고학이란 학문이 도입되고 난 이후 가장 큰 학문적인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78년 한탄강변서 미군(美軍)이 발견-


◇  미군이 발견한 주먹도끼

1978년 4월. 동두천에 주둔중인 미공군 기후 예보대에 군무하던 그렉 보웬 병사는 평소에 사귀던 한국여성과 연천 전곡리 한탄강변 유원지를 찾았다.  “이게 뭐지?”. 여인은 이상하게 생긴 차돌 하나를 주워 보웬에게 흔들어보았다.

자연석 같기도 하고, 누군가 인공적으로 깎은 흔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차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보웬 병사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보웬은 그것이 심상치 않은 차돌임을 직감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당시 서울대 박물관장이던 김원룡 교수에게 이 주먹도끼를 보냈다. 돌멩이 하나에 담겨진 한반도 27만 년 전의 역사가 한 외국인 병사에 의해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차돌을 쥔 김원룡 교수는 즉각 프랑스에서 구석기를 전공한 영남대 정영화 교수와 함께 현장을 답사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채집되는 구석기 유물인 주먹도끼 즉, 양면핵석기(兩面核石器)의 형태가 프랑스 전기 구석기시대 가운데 중기 아슐리안 주먹도끼와 유사함을 확인한 뒤 현지조사 결과를 학계에 발표했다.


이 아슐리안(Acheulean) 주먹도끼 (찍고 자르는 기능을 겸비한 도끼)는 프랑스의 생 아슐(St. Acheul) 유적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붙여진 이름. 약 1백50만년전 아프리카 직립원인에 의해 처음 사용되어 장구한 전기 구석기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구석기시대란 인류가 도구를 처음 사용한 2백50만 년 전 부터 마지막 간빙기가 시작되는 1만 년 전까지를 일컫는 기간을 말한다.

석기를 다듬는 수법에 따라 전기(2백50만년~10만 년 전)·중기(10만년~4만 년 전)· 후기(4만년~1만 년 전)로 나눈다. 그런데 그때까지 동아시아 구석기 문화에서는 유럽·아프리카와는 달리 주먹도끼 문화가 없다는 것이 세계 고고학계에 정설로 굳어져 있었으니 전곡리 전기 구석기 유적의 확인은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27만 년 전 전기 구석기 유적 유력-


◇  불꽃튀기는 연대논쟁


난리가 난 학계는 김원룡 교수를 발굴단장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국립중앙박물관 등 6개 기관 합동으로 학술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연대를 비정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이 유적의 연대가 전기 구석기에 해당되는 20만~30만 년 전이라는 걸 신빙할 수 있느냐는 백가쟁명의 논쟁이 쉴 사이 없이 이뤄졌다.

공동 발굴 참가 대학박물관의 교수들은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고고학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같은 유적을 공동으로 조사하면서 각자 주장이 엇갈려 전공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헷갈리게 했다.


한마디로 열악했던 우리나라 구석기 고고학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발굴이었던 것이다. 결판이 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세계적인 구석기 연구의 권위자를 초빙해 ‘판정’을 내려달라는 부탁을 하기로 결정했다.


지리한 논쟁 4년만인 82년 8월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김원룡 교수의 추천을 받아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고고학을 강의하고 있는 세계적인 구석기 권위자인 존 데스몬드 클라크(J.D Clark) 교수를 초빙하게 되었다.


전곡리 유적을 방문한 클라크 교수는 주먹도끼 등을 관찰한 후 아프리카 전기 구석기시대인 아슐리안기인 생고안 구석기 형태와 유사성이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클라크 교수는 “아프리카 생고안 구석기는 전기 구석기에 해당되지만 전곡의 구석기 유물은 전기 구석기시대 가운데서도 후기에 속하는 27만~26만 년 전 일 가능성이 많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전곡리 구석기의 연대문제에 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가장 핵심은 전기냐 후기냐로 압축됐는데, 말하자면 20만~30만 년 전과 4만~5만 년 전의 주장으로 엇갈렸던 것이다 .

이것은 실로 수 십 만년이 왔다 갔다 하는 연대관의 천양지차라 자칫 국제적인 망신을 당할 소지가 다분했다. 최초 발견으로부터 25년이 경과한 오늘에 이르는 동안 11차에 걸친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아울러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 세계적으로 이 전곡 구석기 유적은 전기 구석기 유적으로 자리 매김 되었고 영국에서 발간되고 있는 세계 고고학지도에 남북한을 통틀어 제일 먼저 등재되었다.


지난 기간 이 전곡 구석기 유적의 구석기 연대 논의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우리나라 구석기 고고학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평가될 것이다.


역사의 자존심?.. 일본..


-‘신의 손’ 후지무라 몰카에 들통- 

◇  돌아버린 일본


비참한 악수(惡手)가 된 자작극 연출=전곡 구석기 유적의 조사는 이웃 일본 고고학계에 엉뚱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나라 중부지방에서의 구석기 유적이 전기 구석기까지 올라가는 데 받은 것이다.


그 결과 81년 일본 미야기현(宮城縣) 자자리기(座散亂木) 약 4만 년 전의 구석기를 발굴해 일본 최초로 구석기 유적의 존재가 밝혀졌고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 유적을 발굴한 문제의 도후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 후지무라 부이사장은 그후 계속해서 20만년전~40만년전~50만년전~70만년전의 구석기 유적 발굴을 잇달아 발표해 일본에서는  ‘신의 손’으로 알려질 정도로 구석기 유적 발굴을 주도해왔다.


이러한 구석기의 발굴은 일본 구석기가 중국과 한국의 역사에 뒤질 수 없다는 그릇된 사관에 젖은 일본의 자존심을 세워주었고 세계 역사상 일본의 우월성을 내세울 수 있었기에 일본 국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영광이 후지무라의 자작극으로 드러난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곡 구석기 유적의 발굴은 이와 같이 일본을 자극해 일본 스스로 무덤을 파는 자작극을 연출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동시에 일본 교과서 왜곡의 근간에 흐르고 있는 우월 주의적 황국사관이 낳은 결과임을 증명하고 있다.

만약 마이니치 신문의 유적조작 폭로가 없었다면 일본의 구석기 왜곡은 영원한 진실로 믿게 되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이와 같이 고고학이 문화우월주의에 편승하면 조작극에 희생될 소지도 있다는 교훈을 남겼고 아울러 고고학의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한 것이다.


전곡리 발굴 산 역사 배기동 교수

“구석기도 재미있는데 말이야”. 배기동(52·한양대 교수)은 자신만 만나면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는 스승(삼불 김원룡 선생)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삼국시대 마구(馬具)가 전공이었던 배기동에게 “전곡리서 뼈를 묻으라”는 스승의 명령이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출토예가 없는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출현은 그만큼 스승을 흥분시켰고 애제자에게 그 과업을 물려준 것이었다. 1993년 11월14일 전곡리 현장. 타계한 ‘한국 고고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삼불(三佛) 선생의 장례식이 열렸다.


배기동을 비롯한 제자들은 스승의 유해를 전곡리 유적에 뿌렸다. 추모 1주년 기념식 때는 삼불의 기념비를 세웠다.

   “당신께서는 한강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전곡리 유적은 어른(삼불)의 최고이자 마지막 발굴인 셈이었으니까요”.

79년 서울대 조교로 전곡리 발굴에 참여했던 배기동은 미 버클리대 유학 이후인 86년부터 전곡리에서 스승의 뜻을 받들어 뼈를 묻기로 했다. 청춘을 바친 전곡리에서 사랑도 얻었고 죽을 고비도 넘겼다.

9년 1차 발굴 때 숙명여대 대학신문 사진기자로 전곡리 현장을 찾은 여인(장명엽씨·49)을  ‘꾀어’ 결혼에 골인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부부는 현장에서 먹고 자면서 발굴에 정열을 쏟았다.

겨울밤을 부부가 보낼라 치면 부부의 몸은 꽁꽁 얼었고 개 짖는 소리에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다. 하루는 작업을 돕던 군부대 포클레인이 유적을 파고 있었을 때 부부는 ‘혹 포클레인이 유적을 파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1m 앞에서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클레인의 삽이 파낸 흙더미 속에 냄비 같은 물체가 3개 들어있었다.

한국전쟁 때 설치해놓은 듯 한 대전차 지뢰였다. 만약 포클레인 삽이 지뢰를 찍었다면 부부는 공중분해 됐을 터였다. 며칠 뒤 군부대에 의해 폭파된 지뢰의 폭발음은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스승의 유업을 이어받은 배기동은 친지들의 도움과 수 천 만원의 사재를 털어 자료관을 만들었고 해마다 5월초(올해는 5월3~5일)에는 연천 전곡리 구석기 축제를 펼친다.  스승과 제자가 이어 지키는 27만년의 역사가 재현되는 것이다.

**  전곡리 유적의 의의  :  


구석기 초기의 석기는 한쪽면 만을 가공하여 만든 찍개가 주류지만 150만년(프랑스를 기준으로)이후에는 석기 제작 기술이 발전하여 양날 도끼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아슐리안 입니다. 


서구 에서는 아시아는 외날 도끼에 의존한 문화 였다고 단정지어 왔읍니다. 즉 모비우스 학설 것이 있는데 주된 요점은 양날도끼의 구석기 문화는 아프리카-유럽으로 양분 하는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동아시아는 '역사가 없다'고 했습니다. 유럽은 발전한 반면 동아시아는 정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럽에는 주먹도끼가 있는데 동아시아에는 주먹도끼가 없다'라는 말이지요.
전곡리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로 모비우스 학설은 지구상에서 종말을 구하고 세계의 역사서는 다시 쓰여졌습니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는 세계구석기 역사에 핵 폭탄과 같은 것입니다.

위로